임진왜란의 일본군 철수는 아프간,베트남전에서의 미군의 철수하곤 경우가 다르다.

임진왜란의 일본군 철수는 아프간,베트남전에서의 미군의 철수하곤 경우가 다르다.






아프간 베트남은 미군이 이길 가망이 없고 막막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일본이 너무 왜성들 잘 짓고 일본쪽으로부터의 보급도 원활하고 왜성들 지역 조선인들도 일본군의 통치에 잘 협조하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는 일본군에 의해 피바다 불바다가 되어있었고 명나라 조선 연합군은 왜성 치다가 연거푸 개털려 많이 뒤지고, 


명나라는 군량 대느라 끙끙끙 국고 털리고, 조선은 재정 궁핍해져서 끙끙대서 


풍신수길이 계속 좀만 더 살았다면 명나라,조선은 GG쳤기 때문에(명사 조선전에도 그리 적혀있고) 


고로 아프간전 베트남전하고는 경우가 다르다. 당시 일본은 국민,민족주의 없어서 


사무라이 다이묘들이 전쟁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걔들은 자기들 영지 관리하는 내정 놀이하며 놀고싶은데 괜히 지들 돈 부어가며 전쟁해야되니까 개빡치는거고.




//명사 조선전의 기록

○[만력萬曆] 26년(A.D.1598; 朝鮮 宣祖 31) 11월에 [가등加藤]청정淸正이 배를 내어 먼저 달아났다. 


마귀麻貴는 드디어 도산島山·서포酉浦註 783에 들어갔고, 


유정劉綎은 예교曳橋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석만자石曼子가 배를 이끌고 [소서小西]행장行長을 구원하려 하자, 


진린陳璘이 이를 맞이하여 쳐부수어 패배시켰다.註 784 여러 곳의 왜군倭軍이 돛을 달고 모두 돌아갔다.註 785


왜倭가 조선朝鮮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는데도 


중국中國과 조선朝鮮이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는데, 관백關白註 786이 죽고서야 화란禍亂이 비로소 종식되었다註 787"_명사 조선전




○ [萬曆 二十六年(1598)]十一月, 淸正發舟先走, 麻貴遂入島山·酉浦校勘 177註 770, 劉綎攻奪曳橋. 石曼子引舟師救行長, 陳璘邀擊敗之.註 771 諸倭揚帆盡歸.註 772


自倭亂朝鮮七載, 喪師數十萬, 糜餉數百萬, 中朝與屬國迄無勝算, 至關白註 773死而禍始息.註 774



校勘 177 新校本 校勘記에 의하면,『明史』卷238「麻黃列傳」에는 ‘西浦’로 되어 있다.


註 770 酉浦 : 本文의 酉浦는 西浦의 잘못이다.


註 771 石曼子引舟師救行長 陳璘邀擊敗之 : 倭將 小西行長이 明將 董一元·劉綎과 講和를 꾀하면서 撤兵하려고 했다. 그런데 明의 水帥 陳璘이 豊臣秀吉의 死去를 듣고 水軍統制使 李舜臣과 같이 倭軍의 退路를 막아 쳐부수기로 하고, 順天城에서 退却하는 小西行長을 援護하기 위해서 온 島津義弘 등의 水軍을 露粱海峽에서 大破했다. 李舜臣은 이에 앞서 鳴梁에서도 大捷한 바 있으나, 이 露粱戰에서 戰死했고, 小西行長은 이 露粱싸움에서 겨우 脫出해서 巨濟島水域으로 해서 歸國했다.


註 772 諸倭揚帆盡歸 : 倭軍은 萬曆 26年(宣祖 31年) 12月 上旬부터 10日間에 걸쳐 모두 北九州 博多에 歸還해서 各自의 領國에 돌아갔다. 그런데 倭의 撤軍이 急速히 推進되어 朝鮮에 殘留된 倭軍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農村社會에 土着埋沒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註 773 關白 : 모든 奏文을 天子의 御覽에 앞서 萬機의 政務를 總轄하는 사람에게 먼저 上申한다는 뜻이다.


<참조>


『明史』朝鮮列傳 註 494)


關白


모든 奏文을 天子의 御覽에 앞서 萬機의 政務를 總轄하는 사람에게 먼저 上申한다는 뜻으로, 『漢書』「霍光列傳」의 ‘諸事皆先關白光 然後奏御天子’에서 緣由한다. 日本에서는 宇多天皇때 一切의 奏文에 대해서 天皇에 올리기 前에 攝政太政大臣인 藤原基經에게 關白케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天皇이 成長하여 攝政이 不必要하게 되었지만, 天皇의 代行格인 이 關白制는 그대로 계속되어 江戶時代末까지 持續되었다. 애초에 攝政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이 關白의 자리는 太政大臣의 위가 되었다. 이런 事情은『政事要略』의 賜攝政太政大臣關白萬機詔條의 ‘其萬機巨細 百官總己 皆關白於太政大臣 然後秦下’와『和漢三才圖會』「官位部」關白條의 ‘關白者 …… 藤原基經公罷攝政爲關白 此號始於此 奉天子敕 執行天下政 以坐人臣上 稱一人父公號太閤 法體號爲禪閤’에서도 알 수 있다.


註 774 自倭亂朝鮮七載 …… 至關白死而禍始息 : 壬辰·丁酉倭禍는 朝鮮뿐만 아니라 東亞三國에 많은 影響을 끼친 7年戰爭이었다. 朝鮮에서는 人畜·家屋·田畓의 被害가 너무나도 컸다. 田土損失만 보아도 戰爭前에 比해서 1/5로 減少되는 지경에 빠졌다. 특히 倭軍占領地에서의 糧食略奪과 壓政은 말할 것도 없고, 明軍의 橫暴에 의한 苦衷마저 컸다. 한편 明에서도 많은 戰死者를 낸 이외에도 1千萬兩을 넘는 莫大한 戰費를 消耗하여 國庫의 缺乏을 가져와서 國運의 衰退를 앞당겼고, 滿洲의 女眞對策을 위한 軍隊를 動員하여 後金의 興起를 이롭게 하는 등 明滅亡의 한 要因이 되었다. 그러나 倭의 경우는 비록 出征軍의 1/3이 희생되었고 많은 戰費를 虛費했으나, 5萬餘名에 이르는 朝鮮捕虜를 拉致하여 利用했고, 이 중에서도 學者·陶工·活版工 등의 捕虜는 당시 發達하지 못했던 文化進展에 크게 貢獻하게 되었다.


朝鮮에서는 이 戰爭이 끝난 후 明에 대한 事大觀念이 더 强力해졌고, 旣往의 여러 制度에 대한 反省이 일어나서 그 改編이 要求되었으며, 思想과 文化界에서도 새로운 時代的 改編과 危機意識에 副應하기 위한 嶄新한 意識構造의 轉換이 漸進的으로 高調되었다. 이러한 時代的 狀況을 우리는 國家再造論의 擡頭와 展開라고 말한다.






註 783 酉浦 : 本文의 酉浦는 西浦의 잘못이다.


註 784 石曼子引舟師救行長 陳璘邀擊敗之 : 倭將 小西行長이 明將 董一元·劉綎과 講和를 꾀하면서 撤兵하려고 했다. 그런데 明의 水帥 陳璘이 豊臣秀吉의 死去를 듣고 水軍統制使 李舜臣과 같이 倭軍의 退路를 막아 쳐부수기로 하고, 順天城에서 退却하는 小西行長을 援護하기 위해서 온 島津義弘 등의 水軍을 露粱海峽에서 大破했다. 李舜臣은 이에 앞서 鳴梁에서도 大捷한 바 있으나, 이 露粱戰에서 戰死했고, 小西行長은 이 露粱싸움에서 겨우 脫出해서 巨濟島水域으로 해서 歸國했다.


註 785 諸倭揚帆盡歸 : 倭軍은 萬曆 26年(宣祖 31年) 12月 上旬부터 10日間에 걸쳐 모두 北九州 博多에 歸還해서 各自의 領國에 돌아갔다. 그런데 倭의 撤軍이 急速히 推進되어 朝鮮에 殘留된 倭軍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農村社會에 土着埋沒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註 786 關白 : 모든 奏文을 天子의 御覽에 앞서 萬機의 政務를 總轄하는 사람에게 먼저 上申한다는 뜻이다.


<참조>


『明史』朝鮮列傳 註 494)


關白


모든 奏文을 天子의 御覽에 앞서 萬機의 政務를 總轄하는 사람에게 먼저 上申한다는 뜻으로, 『漢書』「霍光列傳」의 ‘諸事皆先關白光 然後奏御天子’에서 緣由한다. 日本에서는 宇多天皇때 一切의 奏文에 대해서 天皇에 올리기 前에 攝政太政大臣인 藤原基經에게 關白케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天皇이 成長하여 攝政이 不必要하게 되었지만, 天皇의 代行格인 이 關白制는 그대로 계속되어 江戶時代末까지 持續되었다. 애초에 攝政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이 關白의 자리는 太政大臣의 위가 되었다. 이런 事情은『政事要略』의 賜攝政太政大臣關白萬機詔條의 ‘其萬機巨細 百官總己 皆關白於太政大臣 然後秦下’와『和漢三才圖會』「官位部」關白條의 ‘關白者 …… 藤原基經公罷攝政爲關白 此號始於此 奉天子敕 執行天下政 以坐人臣上 稱一人父公號太閤 法體號爲禪閤’에서도 알 수 있다.


註 787 自倭亂朝鮮七載 …… 至關白死而禍始息 : 壬辰·丁酉倭禍는 朝鮮뿐만 아니라 東亞三國에 많은 影響을 끼친 7年戰爭이었다. 朝鮮에서는 人畜·家屋·田畓의 被害가 너무나도 컸다. 田土損失만 보아도 戰爭前에 比해서 1/5로 減少되는 지경에 빠졌다. 특히 倭軍占領地에서의 糧食略奪과 壓政은 말할 것도 없고, 明軍의 橫暴에 의한 苦衷마저 컸다. 한편 明에서도 많은 戰死者를 낸 이외에도 1千萬兩을 넘는 莫大한 戰費를 消耗하여 國庫의 缺乏을 가져와서 國運의 衰退를 앞당겼고, 滿洲의 女眞對策을 위한 軍隊를 動員하여 後金의 興起를 이롭게 하는 등 明滅亡의 한 要因이 되었다. 그러나 倭의 경우는 비록 出征軍의 1/3이 희생되었고 많은 戰費를 虛費했으나, 5萬餘名에 이르는 朝鮮捕虜를 拉致하여 利用했고, 이 중에서도 學者·陶工·活版工 등의 捕虜는 당시 發達하지 못했던 文化進展에 크게 貢獻하게 되었다.


朝鮮에서는 이 戰爭이 끝난 후 明에 대한 事大觀念이 더 强力해졌고, 旣往의 여러 制度에 대한 反省이 일어나서 그 改編이 要求되었으며, 思想과 文化界에서도 새로운 時代的 改編과 危機意識에 副應하기 위한 嶄新한 意識構造의 轉換이 漸進的으로 高調되었다. 이러한 時代的 狀況을 우리는 國家再造論의 擡頭와 展開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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